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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항쟁 특집: 키워드리포트 02

1980년, 피로 물든 5월의 광주

‘5·18 광주민주화 운동’

한국의 민주정치는 1980년 5월의 광주에 큰 빚을 지고 성장했다. 그때 그곳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왜 일어났는지 명확하게 알고 보아야 한다.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한 그날의 일들을 가슴으로, 이성으로 찾아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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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혹한 유신체제에서도 전국 대학가에서는 유신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을 꾸준히 벌여왔다. 10·26 사태 이후 대학들은 박정희 정권이 유신 때 만든 ‘학도호국단제’를 없애고 학생회를 부활시켰다. 대학사회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정당한 민주정권을 세우기 위한 대중적인 민주화 운동도 준비했다. 광주도 다르지 않았다. 5월 17일 전남대를 주축으로 한 집회에 4만여 명이 모였고, 휴교령이 내려지면 전남도청 앞에서 모이기로 하고 해산했다.  

5월 18일, 비상계엄으로 휴교령이 내려졌고, 학생들은 전남대 앞에서 ‘비상계엄과 휴교령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당시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던 학생 시위와 다를 바 없었던 이 시위가 현대사의 가장 참혹한 국가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로 이어질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권력을 손에 넣은 전두환 정권은 비상계엄 확대와 함께 전라남북도 주요 대학에 제7공수여단을 투입했다. 신군부세력은 야당 지도자 김대중이 전라남북도에서 지지도가 높은 것을 의식했고, 그래서 광주에서 더 강력한 저항이 일어날 것이라 우려했다. 계엄군이 강제해산을 시키자 광주 시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처음에는 최루탄 등을 이용해 진압하다가 오후부터 7공수여단이 진압에 나서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포고령 위반자를 엄중 처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공수부대는 진압봉뿐 아니라, 총기 개머리판 대검까지 휘두르며 폭력적인 진압에 나섰다. 그러자 보다 못한 시민들이 가세하기 시작했고, 밤 9시 이후에는 통행금지조치가 내려졌다.  

다음날 19일에는 제3, 제11 공수부대원 1000여 명이 증원되었고, 가장 잔인한 국가폭력이 자행되었다. 총칼로 무장한 계엄군이 서너 명씩 광주 시내를 누비며 시민들에게 무차별 폭행을 가했고,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자 광주시민 전체가 들고 일어났다. 계엄군의 진압은 학살과 다르지 않았다. 광주 외곽에서는 헬리콥터에서 육지를 향해 사격을 가하고, 시민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으며, 아스팔트에 쓰러져 신음하는 비무장 시민을 구하려 나서는 시민들조차 사살했다. 울부짖던 시민들은 계엄군에 맞서 무장투쟁까지 감행하며 격렬히 저항했다.  

예측을 넘어선 이 같은 항쟁의 발전에 직면하여 신군부세력은 저항세력을 상대로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군에 의한 봉쇄 속에서, 나아가 미국의 협조 속에서 신군부세력에 의한 유혈적인 광주진압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광주항쟁은 마침내 종결되지 않을 수 없었다. _《6월 항쟁과 한국의 민주주의》

계엄군과 시민군의 대치가 계속되자 광주사회의 존경받는 원로들로 수습대책위원회를 꾸렸다. 이들은 계엄군에게 수습방안을 제시하는 한편, 시민군에게도 무기를 반납할 것을 요구했으며, 많은 시민군이 무기를 반납했지만, 일부 강경한 사람들은 이를 거부했다. 계엄군이 여전히 민가를 수색하며 청년들을 죽이고, 시내 전역에 경고문을 뿌리는 등 달라진 게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5월 27일. 외곽에 배치되어 있던 계엄군이 새벽을 틈타 다시 시내로 진입했다. 남아있던 시민군들은 모두 도청으로 들어가 마지막 저항을 했는데, 새벽 네 시, 총공격을 감행한 계엄군에 모두 죽거나 체포되면서 열흘간에 걸친 사건은 막을 내렸다.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때 죽은 사람이 163명, 부상 뒤에 사망자가 101명, 행방을 알 수 없는 사람이 166명, 부상자가 3139명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공식적인 숫자로 당시 분위기로 봤을 때 이 일에 연루된 경우 보복이나 불이익을 받을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신고하지 않은 사람까지 합치면 그 수가 엄청날 것으로 추측된다. 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비극들은 너무 잔인해서 전하기 어려울 정도이며,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비극이었다.

광주를 무력으로 진압한 신군부 세력은 김대중을 비롯한 재야 인사들과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을 내란기도 혐의로 구속했고, 5월 31일에는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1]를 구성했으며, 7월 14일 김대중 일당 내란음모 사건이 발표된다. 이로써 신군부의 집권이 기정사실이 되었고, 최규하 대통령은 8월 16일 잔여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하야했다. 전두환은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로 11대 대통령으로 취임, 제5공화국 시대를 열었다.

한편 전두환은 1996년 12·12 군사반란죄, 5·18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등 13개의 혐의로 1심 재판에서 법적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이듬해 4월 대법원으로부터 무기징역과 2205억 원의 추징금을 확정판결 받았고, 같은 해 12월 특별사면으로 감옥에서 풀려났다.

광주민주화운동으로 희생된 시민들은 ‘북한군의 사주를 받은 폭도’ ‘빨갱이’라는 누명을 벗고 피해보상을 받기도 했지만, 쉽게 치유될 수 없는 역사다. 


1987년 6월항쟁
그 뜨거웠던 날들
맛보기 01: 우리나라 민주주의, 어떻게 발전해왔나
맛보기 02: 영화 <서울의 봄>과 전두환의 12·12 군사반란
💦키워드리포트
01 6월항쟁, 출발선은 ‘서울의 봄’이었다
02 1980년, 피로 물든 5월의 광주: ‘5·18 광주민주화 운동’
03 ‘광주학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청년학생들, 정치적 목소리를 높이다
04 4·13 호헌조치, 민심은 들끓고
05 1987년 6월항쟁: 마침내, 민주주의 함성이, 터져올랐다
06 편집실에서, 6월항쟁 특집에 대한 여운
특집 인터뷰:경희대 미래문명원 안병진 교수
“민주주의는 완성된 것이 아닌, 부단히 만들어가야 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