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의 사람들이 과연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알아챌 수 있을까? 지금처럼 전 세계 상황이 실시간으로 보도되는 때여도 그 의미를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정보의 왕래 자체가 불가능했던 조선시대에는 어땠을까? 세계의 사상과 정치가 어떻게 요동을 치는지 알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더군다나 한반도의 역사는 유구한 세월 동안 중국이라는 대국의 정세 변동에 발맞추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으며, 새로운 문물 또한 중국이라는 창구를 통해서 조금씩 맛보는 정도였다.
16세기 중반 이후 조선의 연해에 낯선 배들이 출몰했는데 대부분은 중국어선이나 상선이었다. 이들은 조선의 해안을 떠다니다 해안가에 상륙해 노략질을 일삼는 조선의 골칫거리였다. 서양의 이양선[1]도 18세기 이전까지 종종 등장하곤 했는데, 대부분 이미 개항한 중국과 일본의 항구를 오가다 표류하는 경우였다. 그러던 것이 18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정탐이나 측량, 통상을 구실로 접근하는 일이 점차 잦아졌다.
1832년 영국 상선 암허스트호가 황해도 몽금포 지역에 출현했다. 동인도회사 소속이었던 이 상선은 통상을 요구했지만, 조선은 거절했다. 순조실록에 적힌 거절 이유가 재밌다. 조선이 청나라의 번국(藩國, 제후가 다스리는 나라)이라서 청나라의 허락 없이는 다른 나라와 교역은 물론 외교 관계도 맺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발 더 나아가 조선은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 같은 상황을 보고하면서 대국에 대한 번국의 충성을 확인받고자 했다. 이에 청나라는 하사품을 내리고 치하했다는 기록을 보면 웃지 못할 일이나, 청나라에 대한 조선의 태도를 짐작케 한다.
이양선의 출몰은 순조 이후로 급증했다. 1846년에는 프랑스 군함, 1865년에는 러시아 함선이 출몰했다. 러시아의 경우 1860년 연해주 점령으로 조선과 국경을 맞대자 통상을 요구하기도 했다. 고종 때에 이르러서는 그 기록이 128건에 달할 만큼 급증했다. 서양과의 무력 충돌이 처음으로 벌어진 것도 이즈음이다.
개화기 주요 인물 중 하나가 흥선대원군(이하응)이다. 그는 영조의 현손으로, 1863년 제26대 왕으로 즉위한 고종이 그의 둘째아들이다. 철종에게 후사가 없는 상황에서 흥선군은 국왕 지명권을 가진 궐내 최고 어른 조대비의 승인 아래 아들을 즉위시켰다. 이때 고종의 나이가 어려(12세) 조대비가 수렴청정[2]을 했고, 흥선대원군이 이 역할을 넘겨받는다.
조대비가 흥선군의 손을 들어준 것은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정치(1804~1862)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오랜 세도정치로 국가재정도 바닥나 있었고, 국가 기강이 무너지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해 백성들은 먹고 살기조차 어려웠다. 이러한 세도정치로 인한 폐해를 제도적으로 고치고, 왕권 강화와 국가재정 확충을 위해 대대적인 개혁정책을 펼쳐나갔다. 그의 정책들은 민심을 얻는 데 성공했다. 상대적으로 개방적이고 개혁적인 정치를 지향한 그가 왜 서구열강의 개방과 개항 요구에 ‘쇄국’이라는 빗장으로 맞선 것일까?
대내외적인 위기감 때문이었다. 오랜 역사 동안 황제의 나라로 받들어온 중국의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무릎꿇는 것을 보면서 위기감이 커졌다. 청나라는 2차 아편전쟁 때 해가지지 않는 대영 영국과 그에 비견되는 프랑스 연합국을 상대해야 했는데, 미국과 러시아도 연합국을 지원했다. 청나라의 참패는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전쟁 후 러시아는 영국·프랑스와 청나라의 강화를 중재했고, 그 대가로 연해주를 손에 넣었다. 그 결과 조선은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게 된다.
대원군의 섭정기였던 1864년, 마침내 러시아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해왔다. 위기를 느낀 대원군은 조선에 들어온 프랑스 신부를 이용해서 프랑스의 힘을 끌어들이려 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한편 이 과정에서 대원군은 조선의 관료와 유생들의 강력한 반발에 맞닥뜨렸다. 가뜩이나 그의 개혁정책도 마땅치 않았는데, 조선의 문화, 전통적인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천주교 신부를 끌어들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대원군은 자신이 천주교와 무관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우리나라 최대의 천주교 탄압을 벌인다. 프랑스 신부 9명과 수천 명의 천주교도를 처형한 병인박해(1866년)가 그것이다. 같은 해 병인박해를 항의하기 위해 프랑스는 함대 7척을 앞세워 강화도를 공격했다. 병인양요라고 부르는 이 전쟁은 조선의 승리로 끝났지만, 강화행궁이 파괴되고 외규장각의 주요 도서와 문화재를 빼앗기는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다. 병인양요 때 흥선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며, 그들과 교역하면 나라가 망한다”며 척화의 의지를 밝혔다. (사진_금관조복을 입은 흥선대원군)
같은 해 병인양요보다 앞서 일어난 제너럴셔먼호와의 충돌도 기억해둘 만하다. 대포로 무장한 미국의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진출, 통상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대포를 쏘며 약탈을 감행했다. 이에 성난 군중과 관군이 배에 불을 지르고 선원들을 살해했다. 이것이 조선으로서는 서양과 벌인 최초의 충돌이다.
1868년에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에 의해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이 도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통상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대원군은 물론 조선인들 모두가 서양에 대해 적개심을 품게 했다. 1871년 미국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항의와 조선의 강제 개항을 목적으로 강화도를 침공, 광성보 전투를 비롯해 승승장구했지만 조선의 끈질긴 저항과 쇄국 의지를 확인하고는 스스로 물러갔다. 이를 신미양요(1871)라고 한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서양의 침략에 대한 공포는 크게 확산되었고,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더욱 굳어졌다. 특히 신미양요 이후에는 이런 의지를 담아 전국에 척화비가 세워지게 되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조선의 개혁과 개방을 늦추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렇듯 중국과 일본이 아편전쟁과 미국의 압박으로 개항을 서두르고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동안에도 조선은 여전히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