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아시아 시장을 탐내던 때, 중국의 청나라는 두 차례 아편전쟁에서 패배해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걸었다. 거대한 전쟁배상금과 막대한 전쟁비용 부담으로 재정은 바닥이 났다. 난징조약으로 상하이를 비롯한 5개 항구를 개항하면서 실업은 급증했고 경기 역시 침체했다. 여기에
서양의 각국들은 통상과 외교를 내세워 속속 불평등조약을 일삼았다.
서양세력의 진출에 불안하고 피폐해진 경제에 불만이 폭발한 민중들은 난을 일으켰다. 1850년 시작된 태평천국의 난이 그것이다. 이들은 1853년 난징을 점령해 수도로 삼을 정도로 세력이 강했고, 1864년 완전 토벌될 때까지 무려 10년 동안 중국의 곳곳을 휩쓸었다. 그야말로 외환에 내우까지 겹친 형국이다.
한편으로는 ‘중체서용(中體西用:중국의 정신을 바탕으로 서양의 기술을 이용하자)’을 내걸고, 나라를 근대화시켜 강국으로 만들자는 부국강병 운동도 일어났으니, 이것이 1861년에 시작된 양무운동이다. 서양식 학교를 세우고, 외국어교육을 통해 통역사를 배출하고, 우수학생들을 선발하여 유학을 시키고, 해운업 육성이나 전신망구축, 철도 부설 등에도 힘을 쏟았지만 가장 중점을 둔 분야는 무기였다. 서양식 대포와 당시에는 일본도 갖추지 못한 군함까지 보유했지만, 1883년 청불전쟁의 패배로 개혁 의지가 꺾이고 1894년 청일전쟁[1]의 패배로 양무운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무엇보다 전제군주제라는 내용은 그대로 둔 채 형식만 바꾸려는 무늬만의 개혁은 애초부터 양무운동이 지닌 한계였다. (사진_난징조약)
난징조약: 1842년에, 아편 전쟁을 종결하기 위하여 난징에서 영국과 청나라가 맺은 조약. 청나라가 영국에 대하여 홍콩의 할양, 광저우ㆍ상하이 등 다섯 항구의 개항, 배상금 지급 따위를 수락한다는 불평등 조약으로, 중국 반식민지화의 발단이 되었다.
한편 미일통상수호조약 이후, 미국은 물론 서양 열강에 항구를 열어준 일본도 불만에 휩싸이기는 청나라와 마찬가지였다. 불평등조약으로 관세가 없는 서양의 상품들이 물밀듯이 들어와 자국의 산업은 침체일로를 걸었다. 치외법권으로 일본 땅에서 범죄를 저지른 외국인도 처벌할 수 없었다. 이때까지도 일본은 막부시대였는데, 막부시대란 오랜 전국시대를 종식시킨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3년부터 에도(지금의 도쿄)에 막부를 두고 전국에는 지역 영주인 다이묘를 두어 통치하던 봉건제를 말한다. 이 불평등한 조약으로 피해를 입는 지역 영주들의 불만이 가득했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곡식 가격은 치솟았다. 궁핍해진 서민들은 도시와 농촌을 가릴 것 없이 폭동을 일으켰고, 그때마다 막부의 군인들이 진압에 나섰다.
막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막부는 서둘러 서양의 학문과 문물을 받아들이고 과학기술을 도입하는 일에 나섰다.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현대식으로 재편하고 신식무기와 서구식 훈련법도 도입했다. 그러나 막부 내 기득권 세력들의 반대로 개혁은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이에 1876년 고메이 천황의 사망으로 자리를 이어받은 메이지 덴노는 도쿠가와 가문에 의해 이어지던 ‘막부 해체’와 군주가 법에 정해진 제한적인 권력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정치체제인 ‘입헌군주제’를 선언했다.
세제를 개혁해서 국가재정을 안정화하고, 그 재정은 항만과 항로 정비, 철도 건설, 전신망 설치 등 사회간접자본의 구축에 투입했다. 이것이 메이지유신(특집플러스 참조)의 시작이다. 그후 1889년 천황에 의해 대일본제국헌법이 발표되기까지 20여 년에 걸친 메이지유신은 신분제 폐지, 근대적 공업 육성, 신식교육, 근대식 군대 육성 등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개혁을 단행했다. 다만 헌법에 삼권분립은 명시해놓았으나, 모든 군대의 지휘권은 천황에게 두어 훗날 군국주의 시대를 여는 단초가 되기도 하였다.
이런 일본의 변화에 직격탄을 맞은 곳은 조선이다. 일본은 막부체제의 종식과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가 확립되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자연스레 열강의 속성인 제국주의 면모들도 받아들였다. 일본의 눈길은 조선을 향했다. 조선을 개항시켜 무역소득을 얻고 필요하면 식민지로 삼겠다는 속셈이었다. 통상을 빌미로 조선에 개항을 요구했지만, 당시의 실권자인 대원군은 꿈쩍하지 않았다. 1873년 고종의 친정체제가 들어서면서 쇄국을 풀고 통상교섭이 진행되는가 싶었지만, 조선 내 위정척사파의 극심한 반대로 협상이 지지부진해졌다.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한자어 풀이는 ‘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은 배척하는 무리’라는 뜻으로 외국과의 통상과 개항에 반대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의병활동을 벌였다.
그러자 일본은 1875년 조선을 압박하려고 군함 운요호를 보내 강화도를 공격했다. 조선 수군과의 교전 끝에 초지진을 파괴시키고, 영종도로 상륙해서 성을 점령한 뒤 대포 등의 무기를 노획해 달아났다. 조선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운요호는 물러났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 사건이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라며 사건 자체를 왜곡했다. 일본으로 돌아간 운요호가 국적 표시를 한 채 단지 식수를 얻으러 갔을 뿐인데 조선의 공격을 받았으므로 국제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일본은 이 일을 빌미삼아 이듬해 2월, 운요호를 포함한 7척의 함선을 강화도로 보내 책임을 물었다.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한강 뱃길을 따라 한양까지 쳐들어가서 공격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사진_운요호)
당시 병인양요(프랑스)와 신미양요(미국)를 치르느라 힘이 빠진 데다가 경복궁 재건으로 재정이 바닥난 조선으로서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더욱이 메이지유신 이후 10여 년에 걸쳐 근대식 군대로 재편하고 신식무기를 갖춘 일본을 전투력으로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선은 청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미 제 코가 석 자인 청나라는 당사자 간의 원만한 합의를 바랐다.
조선은 울며 겨자 먹기 격으로 일본과의 조약을 맺었으니, 이것이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식 조약이면서, 자주권을 깡그리 묵살당한 대표적인 불평등조약이며, 일본의 조선 침략 도화선이 된 ‘강화도조약’이다. 미국이 페리 제독의 함대를 앞세워 일본에 그랬던 것처럼, 일본 역시 조선에 대해 자신들이 미국에 당한 수법을 그대로 적용했던 것이다.
이 조약을 통해 조선은 부산을 비롯해 원산과 인천을 일본에 개방했고, 조선에서의 일본 상인들 활동이 자유로워졌다. 또 조선 내에서도 일본인들은 일본법의 적용을 받았고, 일본은 조선 해안을 마음껏 측량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이 사건을 계기로 서구열강들의 개항 요구도 잇달아서, 1882년 이후에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과도 수교통상조약을 맺게 되는데, 하나같이 불평등 조약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굳게 닫혔던 조선의 문은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열렸다. 운요호사건과 강화도조약을 통해 조선은 오랫동안 지켜왔던 쇄국정책을 접고 일본을 비롯한 서양 열강과의 교류에 나서는, 이른바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하지만 일본으로서는 조선과의 불평등 조약을 시작으로 제국주의 대열에 나서는 첫걸음을 내딛은 사건이다. 또한 이후에 벌어지는 임오군란(1882년), 갑신정변(1884년), 청일전쟁(1894년), 을미사변(1895년), 을사늑약(1905년)을 거치면서, 조선의 망국과 식민지시대를 여는 교두보로 작용했다. 국제정세의 흐름에 눈과 귀를 닫은 채 제 자신만의 영달과 축재에만 눈이 벌건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위정자들이 자초한 우리 역사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개항 이후 조선과 일본의 통상, 어떤 문제 있나
(개항 이후) 일본에 놀아난 건 조선 관료들만이 아니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조선 상인들 역시 일본인들의 사기적 통상에 놀아났다고 주장했다.
항 이후 우리나라에 외화로 들여온 물품 가격이 매우 저렴하여 상민들은 그것을 되팔아 많은 이익을 남겼다. 그러나 수년도 못 돼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보다 더 심한 사기를 부렸다. (중략) 또 우리가 수입해온 물품은 비단·표단·종유칠 등으로 음교한 기물들에 불과하며 우리나라에서 수출한 물품은 쌀·콩·피혁·금·은 등 평일에 사용할 수 있는 물품이었다. 이런 일이 지속되면 나라가 가난해지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쌀이 문제가 되었다. 개항 이전부터 쌀은 일본과 청나라에 밀수출되고 있었지만 그 양은 미미했다. 그러나 1876년 개항 이후 쌀의 수출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빠져나가는 쌀의 양이 급속도로 증가했다. 조선의 쌀값이 일본 쌀값의 3분의 1 가격인데다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석유와 성냥·화장품·모피 등 각종 상품 값을 현금이 아닌 쌀로 치르면서 생긴 현상이었다. 일본 상인들은 조선 쌀을 일본에 가져가 몇 배의 이익을 남기고 팔았다. _《한국 근현대사 산책 1》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