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이 이런데도 조선은 여전히 외세 배격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득세했고, 정국을 이끌 개화파는 나뉘었다. 급진파가 시행하려는 개혁정책은 청나라를 등에 업은 온건파에 막혀 군란 이후에는 번번이 좌절되기 일쑤였다. 근대화를 위한 자금 마련 방법을 놓고도 화폐를 더 찍어야한다는 온건파와 일본의 차관으로 충당하자는 급진파가 대립했다. 심지어는 도로의 개보수나 위생시설 설비, 제도 개선 같은 일도 추진되지 못했다. 그럴수록 청나라의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정치, 외교, 군사, 재정권을 확보해 완전한 자주국가를 이뤄야겠다는 급진파의 생각은 더욱 뚜렷이 굳어져만 갔다. 그러나 이미 조정을 장악하고 3000명의 군사까지 주둔시킨 청나라를 상대하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김옥균과 박영효 등은 영국 영사관와 미국 공사관을 찾아갔다. 조선에서 정변을 일으킨다면 청나라의 무력 개입을 막아줄 수 있는지, 지지나 지원은 할 수 있는지를 알고자 했다. 그러나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공사관을 지키는 소규모 군대만으로는 청나라와 맞붙기 어렵다며 주저했다. 그러나 청나라가 프랑스와의 전쟁을 위해 병력의 절반을 철수시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병력과 자금을 협조하겠다며 지금까지 소극적이었던 태도를 바꿨다.
정변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 급진파의 주요세력들이 모여 거사일을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이 열리는 10월 17일(양력 12월 4일)로 잡았다. 이는 정변의 주역인 홍영식이 우정총국의 초대 총판이어서 축하연 자리를 거사 장소로 삼은 것이다. 이 모임에는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도 참여했다.
이들은 또 정변 수행에 필요한 정보 제공원으로 환관 등을 포섭하고, 일본사관학교의 유학생, 서재필이 이끌던 조련국 병사, 기존의 신식군대 중에서 뜻에 동조하는 조선군인 등을 모았다. 여기에 일본이 내어주기로 한 병력 100여 명까지 가세했다.
드디어 거사일. 그날의 현장을 《고종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날 밤 우정국에서 낙성식(落成式) 연회를 가졌는데 총판(總辦) 홍영식이 주관하였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에 담장 밖에서 불길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이때 민영익도 우영사(右營使)로서 연회에 참가하였다가 불을 끄려고 먼저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는데, 밖에 어떤 여러 명의 흉도들이 칼을 휘두르자 나아가 맞받아치다가 민영익이 칼을 맞고 대청 위에 돌아와서 쓰러졌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흩어지자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이 자리에서 일어나 궐내로 들어가 곧바로 침전(寢殿)에 이르러 변고에 대하여 급히 아뢰고 속히 이어(移御)하시어 변고를 피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경우궁으로 거처를 옮기자 각전(各殿)과 각궁(各宮)도 황급히 도보로 따라갔다.(▲갑신정변 4인방.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정변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한 직후인 1885년에 촬영되었다. 이들의 표정에서 조국 자주 근대화의 꿈을 이루지 못한 데 대한 절망감이 읽힌다.)
김옥균 등은 상의 명으로 일본 공사에게 와서 지원해줄 것을 요구하자 밤이 깊어서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가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호위하였다”
거사가 애초의 계획대로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예정대로라면 현장에서 위정척사파는 물론 온건개화파의 주요 대신들, 청나라와 결탁한 왕비의 측근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단숨에 정국 주도권을 손에 쥐어야 했다. 예정대로 성과를 내지 못한 주모자들은 대궐에 들어가 왕과 왕비의 신변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이튿날, 개화당 정부 수립을 선언하고 새로운 조각을 발표했다. 영의정을 비롯한 주요 요직은 왕실의 종친으로 채웠지만,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개혁을 추진할 자리는, 좌의정에 홍영식, 군사를 책임지는 전후영사에 박영효, 국방과 외교를 담당하는 좌우영사 겸 대리외무독판에 서광범, 병조참판에 서재필, 호조참판에 김옥균 등 거사 주도세력이 차지했다.
그날 저녁, 왕과 왕비는 거사의 당사자인 급진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몰래 일본 공사에게 요구, 거처를 경우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 급진파의 입장에서 창덕궁은 자신들이 움직일 수 있는 병력으로는 혹시 있을지 모를 청나라 군대의 공격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데 반해, 일본으로서는 이미 조선이 새 정부를 선언한 마당에 더이상 청나라의 개입은 없을 것이라는 판단하에 이를 계기로 고종의 환심을 얻으려는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손에 쥔 급진파는 사흘째 되던 날 아침, 개혁정강을 발표한다. 본래 80여 개에 이르는 조항이 있었다고 알려지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4개 조항뿐이다.
1. 청에 잡혀 간 흥선대원군을 곧 돌아오게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
3. 지조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한다.
4. 내시부를 폐지하고 그중에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한다.
5. 전후 간사한 관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한다.
6. 각 도의 환상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
7. 규장각을 폐지한다.
8. 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방지한다.
9. 혜상공국을 혁파한다.
10.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적당히 형을 감한다.
11.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급히 설치한다.
12.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한다.
13.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14. 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하도록 한다.
청나라와의 사대관계 청산, 문벌과 신분제도 폐지, 조세제도의 개정과 재정 일원화, 보부상의 횡포와 특권을 없앤 혜상공국 폐지, 군사제도 개혁, 입헌군주제 실시, 세도정치의 온상으로 변질된 규장각의 폐지와 같이 근대화를 향한 야심찬 개혁안을 담았다. 이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외세의 자주권 침해와 침략에 대한 저항과 독립된 근대 국가의 건설’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 같은 꿈은 곧바로 깨졌다. 청나라 군인들이 곧바로 창덕궁을 공격해왔고, 전세가 불리한 것으로 판단한 일본은 곧바로 발을 뺐다. 붙들린 거사세력들은 대부분 처형되었고, 김옥균을 비롯한 몇몇은 일본으로 도망을 쳤다. 이로써 커다란 꿈을 안고 시작한 갑신년의 정변(1884)이 막을 내렸다. 우정총국에서 거사를 시작하고 창경궁에서 청나라 군대에 의해 무너지기까지 불과 사흘에 걸친 정변이라서, 흔히 갑신정변 앞에는 ‘3일 천하’라는 수식이 붙는다.
정변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 사건이 시사하는 바나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자주 국가 건설을 꿈꾸었으면서도 일본을 정변에 끌여들였다는 점,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 채 개화된 젊은 양반들 몇몇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 등, 실패의 원인을 찾자면 한둘이 아니지만, 열강들의 각축 속에서 나라를 바로잡기 위한 이들의 몸부림은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특히 거사를 일으킨 주도세력들의 나이가 평균 20대였다는 사실은, 요즘 탄핵을 외치며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서 밤샘을 마다하지 않는 청년들의 모습들과도 겹쳐 야릇한 울림이 있다.
정변의 실패로 조선은 더욱 보수화하고 개화는 곧 일본과 같은 외세의 간섭으로 인식되어져 입밖에 오르내리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조선을 먹잇감으로 여긴 청나라와 일본의 각축은 더욱 치열해졌다. 하지만 갑신정변은 개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어 근대적인 국가와 사회를 만들고, 신분제 폐지와 입헌군주제의 실시로 단편적이나마 국민주권을 이루려는 우리나라 최초의 정치개혁운동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또 이렇게 트인 개화와 개혁 요구는 동학농민혁명으로, 갑오개혁으로 면면히 이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영 여운(餘韻)이 가시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