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불안정한 존재로 세상에 던져진다. 날카로운 발톱도, 하늘을 나는 날개도 없다. 자연 속의 인간은 다른 동물과 비교하면 약한 존재일 뿐이다. 인간이 험악한 자연 속에서 혼자 살아가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를 이루고 그 안에서 힘을 합치고, 혹은 적절히 분업을 하면서 환경과 맞서왔다. 제도(制度)는 이 과정에서 생겨난 하나의 양식이다. 사냥한 음식을 배분하는 방식, 잉여 재산을 나누는 방식 등이 제도의 형식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제도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사전적 풀이로는 ‘법이나 관습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사회적 규약의 체계’이다. 인간은 사회를 이루었고 이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정치제도, 교육제도, 의료제도, 결혼제도, 가족제도 등 다양한 제도들이 필요하다. 결국 제도란 ‘사회생활에 필요한 일정한 방식, 기준 등을 정해 놓은 체계’라고 할 수 있다. 현대사회로 오면서 대부분의 제도는 법의 형식을 띠지만, 법으로 규정해놓은 것 이외에 관습이나 습속[1](習俗)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넓다.
제도는 태초부터 있었던 게 아닌, 역사적인 산물이다. 원시사회를 떠올리면 제도라고 이름 붙일 만한 게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인류 문명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삶은 더욱 복잡해졌고, 그만큼 필요한 제도들도 늘어났다. 오늘날에는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 이르기까지 깊숙이 파고들어와 인간의 삶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누구나 제도가 없으면 사회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할 것이다. 몇 사람만 모여도 행동의 규칙을 정하지 않으면 무질서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회보장제도를 보자. 이 제도는 사회구성원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여러 가지 정책을 통해 이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복지제도다. 건강보험, 국민연금, 고용보험, 산업재해 보상보험 같은 사회보험이 이에 속한다. 건강보험이라는 제도가 없었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처럼 제도는 인간의 삶을 보호해주고, 각종 편의를 제공하는 한편 행동의 기준을 정해주어 개개인이 격렬하게 대립해야 하는 부담을 없애주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해 준다.
하지만 제도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밖에 없고, 때로는 개인을 억압하는 권력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제도가 ‘억압’과 ‘강제’에 기초한 사회적 통제수단이므로, 제도를 개혁하고 제도의 범위와 영향력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다른 한편에서는 제도의 긍정적인 점, 불가피성을 주장하면서 혹여 제도의 문제점이 있다고 해도 이에 대한 부분적인 개선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맞선다.
제도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논쟁의 중심에는 독일의 철학자 겔렌과 아도르노가 있다. 두 사람 모두 제도의 불가피성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아도르노는 제도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억누른다는 점을, 겔렌은 인간의 안전이 중요하는 점을 강조, 다른 결론에 이른다.
독일의 철학자 아놀드 겔렌(Arnold Gehlen, 1904~1976)과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 1903~1969)는 1950년대 제도의 문제에 대해 수차례 라디오 토론을 벌였다. 다음 구절은 제도에 대한 겔렌의 생각을 비교적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제도는 인간의 생식과 보호, 생계유지와 같은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형식이다. 그것은 인간 상호간에 규칙적이고 지속적인 협력을 요구하며, 다른 한편 안정된 권력이 된다. 제도는 본래 불안정한 존재인 인간들이 서로 견뎌내고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찾아낸 형식이다. 제도 안에서 삶의 목적이 공동으로 추구되고 우리가 무엇을 하고, 하지 말아야 되는지를 결정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으며 내적 삶의 안정을 획득한다. 그리하여 제도는 우리가 항상 격렬하게 대립해야 하는 부담과 기본적인 문제에 대하여 결정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_겔렌, 《인간학적 탐구》
겔렌은 사법, 의료, 교육, 가족 등의 제도는 불안정한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둥지이며, 불안정한 인간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으로, 인간의 본성에서 온 것이라며 제도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제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는 주장이다.
아도르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중심 인물로 근대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 유명한 철학자이다. 아도르노는 겔렌과의 논쟁에서 제도가 인간을 기계 장치의 한 부속품으로 만듦에 따라 인간을 삶으로부터 소외시킨다며 제도 자체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그는 개인은 본래 자유의지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선택할 수 있고, 그 행위에는 자발적인 책임이 따른다고 보았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오히려 인간의 자발성과 창조성을 억압하는 도구로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위해 만든 제도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인간 위에 군림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인간은 거대한 제도의 권력에 저항할 힘을 잃고 스스로 복종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물론 아도르노 역시 제도가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는 겔렌과 의견을 같이한다. 하지만 제도의 발전과정이나 역할에 대해 겔렌처럼 낙관적으로 보지 않았고, 제도의 틀에 안주하며 제도가 낳은 부정의와 문제점을 안고 갈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프랑크푸르트학파
1930년대 이후 등장한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대학교의 사회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신마르크스주의 사회 이론가 집단을 가리키는 말. 이 학파의 사상은 1968년 이른바 68혁명이라 일컫는 유럽과 일본의 대학가를 강타한 학생 운동의 지적 배경이 됐다. 중심 인물로는 마르쿠제,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에리히 프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