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은 민주당과 공화당의 치열한 정치 공세 속에서 치러진다. 한국의 정치도 크게 다를 바 없다. 현대 대의민주주의의 꽃은 정당정치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들이 국민의 뜻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념과 목적이 다른 정파 간의 경쟁은 현대 민주정치 발전의 자연스러운 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는 어땠을까? 조선을 배경으로 한 역사 드라마를 보면 늘 나오는 장면. 임금은 높은 권좌에 올라 앉아 있고, 신하들이 아래에 도열해 있다. 어떤 사안에 대해 임금이 말하면 신하들이 상반된 견해를 밝히며 으르렁거린다. 점잖게 주고받던 공론이 궐 밖으로 이어지면 음모로 변한다. 각 진영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대감의 집에 우르르 몰려가서 은밀하게 모략을 꾸민다.
제국주의 일본은 알게 모르게 ‘조선 왕조는 이런 당파 싸움 때문에 망한 것’이란 왜곡된 사고를 우리에게 주입했다. 과연 그럴까? 사실 이런 당파 간의 정치적 격돌은 어떤 나라에서든 있어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선의 붕당(朋黨) 정치는 하나의 정치체계로 건강하게 발전해나가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변질돼 역사 드라마에서처럼 자기 세력의 이익을 위한 극렬한 세력 싸움이 돼버린다. 붕당은 이해(利害)나 정치적 견해 등이 같은 사람들의 결합체로, 특히 조선시대에는 이념과 이해 관계, 문맥에 따라 파벌을 이룬 사림(士林) 집단을 뜻한다. 붕당으로 인해 정치적 혼란이 극심해지자 영조와 정조는 탕평 정책을 펴지만, 한계가 분명해 정조가 죽고 세도 정치가 득세한다.
사림은 조선 건국 과정에서 공신으로 인정받은 권력 지배층인 훈구파의 권력 독점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사림의 뿌리는 조선 건국 초기, 고려에 충절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재야에 묻혀 있던 온건파 사대부들이었다. 사림 세력은 향촌에 곳곳에 뿌리를 둔 사대부들로 훈구파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개혁적이었다. 이러한 사림이 중앙 정치 무대에 등장한 것은 성종 때였다. 이들이 등용되면서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 격렬해지면서 여러 차례 사화가 발생했다.
사림은 여러 차례 사화로 큰 타격을 입지만, 교육기관인 서원과 향촌 조직인 향약을 중심으로 꾸준히 세력을 키워나가, 선조 때는 정국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사림 안에서도 정치 이념과 학문적 성향에 따라 파벌이 갈려 붕당이 형성된다. 훈구파가 득세하던 시절에도 정치에 참여했던 기성 사림은 서인, 선조가 왕위에 오른 뒤 등용된 신진 사림은 동인으로 불린다. (나중에 동인은 정여립 사건을 계기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된다.)
붕당 정치란 어떤 걸 말하는 걸까? 한국사 교과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붕당 정치는 정치와 학문적 입장에 따라 모인 사람들이 공론을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국정을 이끌어가는 정치 형태를 말한다. 붕당 상호 간의 비판과 견제가 가능하며 재야 사림의 의견까지 폭넓게 수렴하여 정치에 반영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공론은 현재와 같은 ‘다수의 의견’이란 뜻이 아니다. 정부 정책 등에 대해 각 붕당이 타당성을 검토한 ‘공정한 의견’이란 의미다. 정치적 견해가 한 방향으로만 흐를 때 필연적으로 독재로 흐른다. 서로 견해가 달라도 갑론을박을 거쳐 공정한 의견을 모으는 것은 정치의 순기능이다. 따라서 붕당 정치는 어떤 의미에서 현대 정당 정치의 맹아로 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붕당 간 경쟁을 통해 상호 견제가 가능했던 순기능이 있지만, 붕당 정치는 시간이 갈수록 변질된다.
정여립 사건 (기축옥사): 1589년(선조22) 정여립이 모반을 꾀하였다 하여 다수의 동인이 처벌된 사건이다. 2년 반 정도 지속되면서 1000명 정도가 사망했다. 사건에 대한 사료가 부족하고, 사건에 대한 해석이 당파적으로 이루어져 사건의 전모가 분명하지 않은 사건이다.
조선은 건국 초기 왕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적인 유교적 통치체제를 갖추었지만, 붕당 간의 대립과 격돌은 조선의 정국을 혼란에 빠뜨렸다. 붕당 정치는 처음 붕당이 형성된 선조(16세기)부터 세도 정치 이전인 정조(18세기) 때까지 계속 됐다.
한편 신진 사림인 동인은 정여립 사건으로 막대한 희생을 치렀지만, 그 수가 워낙 많아서 동인과 서인의 세력 균형은 쉽게 깨지지 않았다. 그러다 광해군의 외교 정책에 대한 찬반 논쟁에 휩쓸리며 균형이 무너진다. 광해군은 쇠퇴하는 명나라와 부상하는 청나라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실리를 취하는 외교정책을 취하려 했다. 동인은 광해군의 외교 전략에 찬성하는 입장이었고, 서인은 비판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또다시 균열이 일어난다. 동인 중에서 서인을 강경하게 비판하는 북인과 상대적으로 온건한 남인으로 분열되었다.
붕당 간의 세력 관계가 어수선한 와중에 서인은 인조반정에 성공한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인조)을 왕위에 올린 서인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이었던 남인과 50여 년 동안 공존하며 붕당 정치를 유지했다. 물론 서인이 다수파였고, 남인은 소수파였다. 그러나 이 관계도 한결같지는 않았다. 서인과 남인은 예송을 둘러싸고 두 차례 크나큰 논쟁을 벌였다. 이는 붕당 정치의 대표적 사건으로 꼽힌다. 예송은 쉽게 말하면 효종 장례에 계모인 대비가 죽은 아들의 상복을 얼마동안 입어야 하는지를 둘러싼 논쟁이다.
예송(禮訟)
예송은 조선 후기 현종·숙종대에 걸쳐 효종과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의 복상기간을 둘러싸고 일어난 서인과 남인간의 두 차례에 걸친 논쟁이다. 1659년에 기해예송이, 1674년에 갑인예송이 있었다. 17세기에 율곡학파로 대표되는 서인과 퇴계학파로 대표되는 남인이 예치가 행해지는 이상사회 건설을 위한 실현방법을 둘러싸고 전개한 성리학 이념논쟁으로, 조선 후기 정치형태였던 붕당정치를 대표하는 정치적인 사건이었다. 예에 관한 논쟁을 넘어서 왕위 계승의 정통성 문제와 연결되는 문제인데다 붕당이 결합되어 정치담당 세력이 일거에 교체되는 등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_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주자가례》에 따르면 장남이 죽으면 어머니가 3년 상복을, 차남의 경우 1년 상복을 입는 것으로 돼 있는데, 효종이 인조의 장남이 아닌 차남이므로 서인은 1년 상복을 주장했고, 남인은 왕에 대한 예우를 갖춰 3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차 예송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2차 예송에서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얼핏 읽으면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지가 그렇게나 중요한 일인가 싶겠지만, 예송은 단순히 복제를 둔 당쟁만은 아니었다. 그 안에는 임금과 신하 혹은 부모와 자식 등 당대의 핵심적인 이념의 경중을 따지는 논쟁이었으며 “당시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 효종의 정통성, 왕권과 신권의 관계 등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오는 중대한 정치현안”(우리역사넷)이었다. 결국 예송 논쟁으로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격화되었고, 이후 숙종 대에 와서는 권력을 잡는 붕당이 교체되는 환국이 수차례 벌어졌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권력을 잡은 붕당이 정국 운영을 좌지우지하면서 조정을 지배하려 했으며, 이 과정에서 조정의 안정과 정치체제가 흔들리고, 백성의 삶을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했다.
붕당 정치가 많은 폐해를 낳은 것도 사실이고, 이념이나 정치노선의 차가 크지 않은 권력 투쟁의 성격이 큰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한 가지 유념해야 할 부분이 있다.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면서 조선 왕조가 망한 것은 조선인이 당쟁을 일삼는, 분열을 좋아하는 민족성 때문이라며 붕당을 조선 후기 정치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근거로 삼았다. 이러한 식민사관은 해방 이후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해 조선 후기의 정치 상황을 세계사적인 맥락에서 객관적으로 보는 것을 방해하고, 조선 후기 역사 전체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 당쟁이란 말 대신 붕당이란 말을 쓰게 된 것은 이러한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임을 알았으면 한다.
붕당 정리
ㆍ동인 VS 서인: 기성 사림은 서인, 선조가 왕위에 오른 뒤 등용된 신진 사림은 동인이다. 초반에는 동인이 우세했지만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로 서인이 권력을 잡는다. 그러나 광해군의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의 세력이 약화되고, 동인이 집권하게 된다.
ㆍ북인 VS 남인: 동인 집권 후 서인의 처리를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로 분열된다. 강경파가 '북인'이고 온건파가 '남인'이다. 북인은 광해군 지지파. 이후 서인과 남인이 인조반정을 일으켜, 북인은 정계에서 완전히 사라져 서인과 남인 세력만 남게 된다. 서인과 남인은 이후 북벌론과 예송논쟁으로 집권과 실각을 반복하다가 숙종 때 남인이 완전히 실각한다.
ㆍ노론 VS 소론: 그러나 서인은 다시 분열한다. 남인 처벌에 있어 강경파가 '노론', 온건파가 '소론'이다. 영조의 탕평 정치로 노론과 소론이 공존했지만, 노론이 더 우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