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 겨울, 명과의 전쟁에서 기세를 올리던 후금의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조선을 압박해왔다. 정묘호란 이후 조선과 후금은 형제 관계를 맺었지만, 군신 관계로 격을 올릴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은 임진왜란 때부터 맺어온 명과의 관계를 중시했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싸워서라도 명분을 세워야 한다는 주전파가 득세, 강경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명은 내부의 혼란과 잇따른 반란으로 국력이 크게 기울어 조선을 도울 여력이 없었다.
조선이 끝내 황제의 나라로 예우하지 않고 ‘청국한’ 같은 타협안을 내놓자, 청 태종 홍타이지는 대군을 이끌고 조선 정벌에 나섰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자 조선의 방어선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인조와 조정은 강화도로 가려다 청군에게 길이 막혀 부득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게 된다. 강화도에는 세자빈, 봉림대군(훗날 효종)을 비롯한 다른 왕족이 피난해 있었다.
청국한: ‘청국한(淸國汗)’은 병자호란 직전 조선이 청을 어떻게 부를지 두고 내놓은 타협안이다. 청은 자신들을 ‘대청국 황제(大淸國皇帝)’로 부르며 황제국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조선은 명에 대한 의리와 기존 사대 질서를 의식해 수용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국호는 ‘청국(淸國)’이라 부르되, 최고 통치자 칭호는 중국 황제 대신 변방 유목 지배자를 가리키던 ‘한(汗)’을 써서 ‘청국한’이라 부르겠다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청은 자신들을 오랑캐 우두머리로 격하하는 표현에 모욕을 느꼈고, 결국 조선 정벌을 결심하게 만든 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간 뒤 곧바로 산성은 청군들에 의해 겹겹이 포위되었다. 광주 쌍령에서 충청도 근왕병(왕이나 왕실에 충성을 다 바치는 군인)이 청군 기병대에 맞섰으나 처참하게 패배했다. 평안도에서 남하하던 군대 역시 평양에서 청군에게 패하며 북쪽에서의 구원도 무산되었다. 철석같이 믿었던 명나라가 구원병을 보낸다는 소식도 없었다. 아니, 구원병을 보낼 처지도 못 되었다. 이미 만력제(명나라의 제13대 황제) 말기의 국정 혼란, 환관의 전횡, 군비 부족, 전국 각지의 농민반란으로 국력이 급감한 명나라로서는 조선에 파견할 지원병은 엄두도 못 낼 만큼 쇠약해진 후였다. 이로써 외부에서 도움이 될 만한 길은 사실상 모두 차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