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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톺아보기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깨다

‐실학자들이 던진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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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과 ‘의리’에 갇힌 나라

병자호란을 굴욕으로 마감한 조선의 현실은 그야말로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조선과 청나라가 전쟁 이후로 그동안의 형제 관계를 넘어 군신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설명은 충분하다. 왕세자를 비롯한 왕족과 대신들이 볼모로 잡혀갔고, 수많은 궁녀들이 공녀로 바쳐진 것만으로도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포로와 인질로 끌려간 조선인만도 거의 50여만 명. 이들은 청나라의 노예시장에서 거래되었는데, 가족들은 이들을 데려오려고 속환금을 지불해야 했다. 심지어 이렇게 돌아오더라도 여자들의 경우에는 ‘환향녀(還鄕女)’라는 딱지를 붙여 정조를 잃었다는 손가락질을 해대며 냉대하거나 이혼 요구를 당했다. 무엇보다 전쟁터가 되었던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일대는 농경지가 완전히 쑥대밭이 되면서 먹고 사는 일부터 걱정을 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생산이 마비되니 세금을 낼 도리가 없고 자연스레 국가의 재정도 무너졌다.

속환금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들을 몸값을 치러주고 송환해 오는 것을 속환(贖還)이라고 한다. 왕족이나 군인의 경우 국가에서 몸값을 치러주었는데 이를 공속이라고 한다. 일반 백성들은 가족들이 개별적으로 속환금을 치르고 데려왔는데 이를 사속이고 한다. 정묘호란 후에는 의주나 중강, 병자호란 후에는 심양에서 주인들과 흥정을 하는 시장이 열렸다. 처음에는 속환가가 1인당 포 10필(쌀 10석)정도였으나, 점점 주인들이 몸값을 지나치게 많이 요구하여 성사가 쉽지 않았다. 조선 정부에서 특별사신인 속환사가 3차에 걸쳐 파견되었으나 총 2~3천 명 정도밖에 돌아오지 못했다. _<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