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정체불명의 우주선이 불시착한다. 이윽고 지구인들은 인근에 외계인 격리구역 ‘디스트릭트 9’을 만들어 외계인들을 가두고 방치한다. 외계인들은 외부에서 식량과 생필품을 조달받아 수용소 안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는 듯 보이지만, 이것이 과연 진정한 자유일까? 영화 <디스트릭트 9>의 줄거리. 이들 외계인의 생활상을 지금 한국의 장애인의 삶과 오버랩한다면 과도한 논리적 비약일까?
2017년 조사에 따르면 장애인 수는 전체 인구의 5%가 조금 넘는다(5.39%). 20명 중 1명은 장애인이라는 뜻이다. 이 수치를 염두에 두고 우리 주위를 둘러보자. 가족, 친구, 지인들을 떠올려보고,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휴대폰 주소록의 이름을 쭉 살펴보자. 우리의 삶에서 장애인은 얼마만큼을 차지하는가? 이십분의 일? 백분의 일? 장애인은 스물에 한 명꼴인데 왜 학교에서, 직장에서, 버스와 지하철과 거리에서 장애인을 볼 수 없는 걸까? <디스트릭트 9>처럼 물리적인 격리구역을 만들어 장애인을 가두어둔 것은 아니지만, 실제 장애인들에게 우리 사회는 창살 없는 감옥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생애주기와 관련해 살펴보자. 장애인에게 이 사회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두려운 곳이다. 특히 가난한 가정일수록 더 심각하다. 장애아를 돌보려면 가족 중 누군가 직장을 포기하고 아이를 꼬박 24시간 돌봐야 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 장애가 심할 경우 어쩔 수 없이 장애인 거주시설에 맡긴다. 장애인은 학창시절도 격리되어 보낸다. 비장애인과 함께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특수반으로 분리되거나, 특수학교에 배정된다. 성인이 되어서는 직장을 가질 수 없거나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을 받는다. 노동을 하고 보수를 받으면, 그나마 받던 사회의 지원이 끊긴다. 장애가 다 ‘나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노동을 통한 수입이 없으니 장애인은 ‘사회가 제공하는 집’에서 겨우 ‘밥만 먹고’ 산다. 문명사회의 기둥인 자본으로부터 그들은 분리당한다. 장애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최종적인 격리다. 장애 인권 문제를 들여다보면 <디스트릭트 9>은 절대 과장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유치원 교사
아르헨티나의 노엘리아 가렐라(31)는 어릴 때 다운증후군이라는 장애 때문에 ‘괴물’이라는 놀림을 받고 유치원 입학을 거절당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커서 유치원 교사의 꿈을 이뤄냈다. 아르헨티나의 한 유치원은 노엘리아 가렐라를 유치원 교사로 정식 채용했다. 아르헨티나 최초의 다운증후군 교사인 셈. 이 유치원의 원장은 “가렐라를 고용하기로 한 것은 매우 독특한 경험”이라면서 “아이들이 그를 받아들이고 그가 유치원의 일원이 되는 과정은 우리 인생에 중요한 교훈을 줬다”고 말했다.
장애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디자인이 있는데 ‘장벽 없는 디자인’과 ‘모두를 위한 디자인’이 그것. 언뜻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조금 다르다.
일반적인 가위와 변기는 오른손잡이용이다. 그래서 왼손잡이는 가위 사용이 영 불편하고, 변기 물을 내릴 때도 마찬가지로 불편하다. 장벽 없는 디자인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왼손잡이용 가위와 변기를 만들면 된다. 하지만 왼손잡이용이나 오른손잡이용은 모두를 위한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용도로 쓸 때는 괜찮지만 공공 물품이나 공공 시설물로는 적합하지 않다. 
모두를 위한 디자인의 관점이라면 양손잡이용 가위를 만들고 변기의 양쪽에 모두 레버를 달면 된다. 앞에서 잠깐 소개했는데, 모두를 위한 디자인, 즉 유니버설 디자인은 영국의 셀윈 골드스미스가 1963년 만든 개념이다. 아홉 살 때 척수성 소아마비에 걸려 휠체어를 이용했던 그는, “모든 나이, 모든 능력을 위한 디자인”이라는 평소 소신을 펼치기 위해 유니버설 디자인이란 개념을 만들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고민도 어쩌면 이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공공 물품이나 공공시설물을 사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모두의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예를 들어,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에게 절벽이나 다름없는 계단과 문턱을 줄이거나 없애고, 엘리베이터와 경사로를 설치하면 장애인뿐만 아니라 비장애인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터치스크린과 음성인식기술은 장애인뿐만 아니라 비장애인의 삶도 윤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장벽 없는 디자인이 훌륭한 대안일 수 있다. 시각장애인을 위해서 모든 사람이 점자책이나 소리책을 이용하는 것보다는 시각장애인의 정보접근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모든 출판물을 점자나 소리책으로도 제작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비용이 들겠지만 그것은 한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구성원을 위해 우리가 마땅히 지불해야할 비용이다.
물건뿐만이 아니다. 정책이나 제도 역시 모두를 위해 디자인되어야 한다. 비장애인에게만 유리한 노동가능성 평가체계, 교육체계, 문화·여가생활 지원체계, 공적 서류 작성체계, 투표체계 등은 장애인도 평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다시 디자인해야 마땅하다.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치료라는 이름의 ‘인간개조’가 아니다. 사람을 개조하는 것보다 훨씬 시급한 일은, 사람들이 태어난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사회를 개조하는 일이다. 우리 사회를 리디자인해야 한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40여 년을 목수로 일하다 심장질환에 걸려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다니엘 블레이크 씨의 이야기다. 그는 질병 수당을 신청하지만, 복잡한 서류·신청 절차 때문에 갖은 수모를 당한다. 그는 컴퓨터 사용 방법도 배워보고 공무원들에게 도움도 청해보지만 뾰족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다. 그러자 그는 고용센터 건물 벽에 빨간 스프레이로 글을 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굶어 죽기 전에 질병수당 항고 날짜를 잡아줄 것을 요구한다.”
2017년 2월 15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이자 노들장애인야학 교장인 박경석 씨가 사회보장위원회 건물 외벽과 유리창에 빨간 스프레이로 이렇게 썼다. “나, 박경석, 개가 아니라 인간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여러 번 덧칠해서 썼다.
이에 발맞춰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공동행동,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빈곤사회연대 회원들이 사회보장위원회가 있는 서울 서대문구 국민연금 충정로 사옥 앞에서 ‘활동보조 24시간 보장’과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등 사회보장기본법 개정을 요구하며 팻말을 들었다. 모든 팻말에는 그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 인현, 나는 하찮고 쓸모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나를 더 이상 모욕하지 마십시오!’, ‘나는 게으름뱅이도 거지도 아닙니다. 내 이름은 최영은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드러내는 일종의 상징으로 이름을 사용했다.
장애인은 존엄성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차별 때문에 장애인은 노동의 주체가 될 수 없고, 따라서 사회 또는 가족으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식사나 목욕 같은 사소한 일상을 위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려면 ‘내 돈’이 아니라 ‘사회의 돈’ 또는 ‘가족의 돈’ 이 꼭 필요하다. 그런데 개인이나 가족은 물론이고 ‘사회의 돈’마저도 불충분하다.
우리 사회는 장애 등급을 철두철미하게 심사(?)해서 최소한의 금액만을 지원한다. 따라서 장애인은 비장애인이 흔히 즐기는 영화 관람 같은 문화·여가생활을 즐기기 어렵다. 돈이 있어도 마찬가지다.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문화·여가시설, 식당, 백화점, 쇼핑센터 등을 찾기 어렵다. 흔한 맛집 여행도 불가능하다. 휠체어가 드나들기 어렵고, 겨우 들어갔다고 해도 제대로 앉아서 밥을 먹을 여건이 안 되는 식당이 너무 많다. 또한 지하철이나 버스, 기차나 고속버스조차 편하게 이용할 수 없으니, 비장애인이 당연히 누리고 있는 대부분의 것을 장애인은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은 천재다. 하지만 물고기를 나무타기 실력으로 평가한다면 물고기는 평생 자신이 형편없다고 믿으며 살아갈 것이다.”
어쩌면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우리 사회는, 물고기를 나무타기 실력으로 평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은 각기 다른 신체적·정신적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 각기 다른 환경에서 살아간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 사람의 가치(임금)를 그 사람이 가진 능력(노동력)을 통해 평가하는 능력주의(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야 한다. 장애인에게 이러한 능력주의 사회는 비장애인에 비해 훨씬 가혹하다. 사람의 가치를 능력으로 평가한다면 대다수 장애인의 가치는 낮게 평가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장애인이 비장애인이 누리는 인간적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장애인 복지, 장애인 노동권 보장이 반드시 필요하다. 공정한 경쟁이란 무엇일까. 신체적 정신적 조건을 감안하지 않고 똑같은 출발선에 세우는 것이 공정한 경쟁일까?
흔히 장애인 복지 향상을 주장하면 “우리도 먹고살기 힘든데, 왜 우리가 장애인까지 도와야 하나?”라고 되묻는다. 복지를 위한 증세를 주장하면 더하다. 이들은 자신들이 장애인을 ‘돕는다’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은 오랜 세월 동안 노동과 소비의 진정한 주체로 인정받지 못한 채 대상화되어 왔다. 오늘날까지도 장애인은 변변한 직업을 가질 수도 없고, 취업을 해도 최저임금조차 보장받지 못한다. 이런 사회에서 장애인에게 허락된 역할은 단 하나뿐이다. 부양의 대상.
장애인 스스로 부양의 대상이 되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장애인을 부양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장애인의 노동권을 보장하지 않으려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의지다. 만약 장애인을 이처럼 부양의 대상으로 취급하려면, 부양의 폭을 지금보다 훨씬 넓혀야 한다. 비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공적 서비스를 모든 장애인이 똑같이 누릴 수 있게끔 만들고, 장애인이 배고픔, 더위와 추위, 고통, 위험 등 부정적인 요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을 사회가 떠안아야 한다. 이는 도움이나 자선사업이 아니라, 한 사회에서 같이 살아가는 우리들이 응당 치러야 하는 사회적 의무일 뿐이다.
물론 장애인을 ‘지원하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물고기가 헤엄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비장애인의 능률을 평가하는 잣대로 장애인의 능률을 평가하지 말고, 장애인 개개인의 능력에 알맞은 일자리와 업무 환경을 제공함으로서 장애인의 노동권을 보장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장애인을 노동과 소비의 진정한 주체로서 이 사회에 통합시키는 것 말이다.
사회는 장애인 특수시설을 ‘복지시설’로 여기지만, 장애인들은 그것을 ‘격리시설’로 여기며 ‘탈시설’을 요구한다. 자유로운 비장애인의 사회는 장애인에겐 감옥이다. 왜 그럴까?
장애인과 비장애인 학생이 학교를 따로 다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장애인의 학습태도가 비장애인의 학습 성취도에 나쁜 영향을 미칠까봐’라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사회는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곳이고, 장애인도 이 사회의 주인이다.
왜 비장애인의 ‘배울 권리’를 위해 장애인의 ‘격리되지 않을 권리’가 침해당해야 할까?
회사의 ‘효율적인 운영’에 방해가 된다며 장애인의 ‘노동권’을 빼앗고, 집값·땅값이 떨어진다며 장애인 주거시설 유치를 반대하며 장애인의 ‘주거권’을 빼앗는 우리 사회는 어떤 면에서 사실상 특수학교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학교와 직장, 사람사는 곳이면 어디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섞여 있는 것이 당연한데, 왜 그렇지 않을까? 사회적 다수인 비장애인의 권익을 위해 장애인을 격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가? 이것은 장애인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집단적 이기심이 반영된 결과다.
한편 장애인 학생이 따돌림을 당할까봐 분반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가정에서 장애인을 돌보기가 어려우므로 장애인은 따로 살아야 한다는 주장, 장애인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위험하므로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한다는 주장 등이 이와 비슷하다. 이런 주장은 사회의 잘못을 장애인의 탓으로 돌린다.
장애인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없는 이유는 장애인이 아닌, 사회에 있다. 장애인 학생에 대한 따돌림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장애인 학생을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가하는 비장애인 학생들을 교육해야 한다. 또한 장애인을 가정에서 돌보기 어렵다면 장애인을 격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돌볼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고, 현재의 대중교통이 장애인이 이용하기에 불편하다면 대중교통을 바꾸어야 한다. 국가는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사람답게 살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장애인이 격리시설 밖 어디에서나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갈 책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