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나는 혜영과 둘이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날 처음으로 그녀의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나누었다. 중증 발달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혜영의 동생 혜정은 어린 시절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당시까지 여주에 있는 한 이름 없는 산 속의 장애인수용시설에서 살고 있었다. 난 당시 혜정을 만나본 적도 없었고, ‘장애인수용시설’이 뭔지도 몰랐으며 발달장애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당시 혜영은 동생을 시설에서 데리고 나와 살고 싶은데, 현실적인 문제로 이런저런 고민이 많다고 이야기했다. ‘동생은 거의 항시 돌봄이 필요한데, 한국은 그런 돌봄을 사회적으로 제공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같이 살면서 일을 하고 생활을 꾸려나가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쉽지 않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혜영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다른 무엇보다, 자신이 아무리 같이 살 준비가 되어있어도 동생이 시설에서 계속 살고 싶다고 이야기하면 어떡하나 하는 것이 가장 걱정이라고. 이야기를 듣던 나는 뭐가 그렇게 어렵냐는 듯 말했다. “그냥 살고 싶은 곳에서 계속 살면 안돼요?” 그 말을 하는 순간 혜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 날의 대화는 별로 좋게 끝나지 않았다.
시간이 꽤 흐르고 나서 재작년 5월, 혜영은 결국 혜정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긴 설득의 과정 끝에 동생이 자신과 함께 사는 것에 동의해 주었다고 혜영은 말했다. 그녀의 예상대로 서울시는 그녀와 혜정을 위해 거의 아무런 복지서비스도 제공해 주지 않았다. 어떤 프로그램은 단순히 신청을 하기 위해서 ‘서울시에서 6개월 이상 거주’라는 자격을 요구했다.
동생과 함께 살면서 원래 하던 대로 일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혜영은 이 6개월의 시간동안 일을 관두고, 동생과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을 다큐멘터리로 찍을 생각이라고 이야기했다. 혜영은 다큐멘터리 제작비를 모으기 위한 크라우드 펀딩 소개글을 내게 보여주었다. 프로젝트의 이름은 <어른이 되면>. 펀딩 목표 금액은 5000만 원이었다. 주변 사람들과 함께 펀딩이 모이는 것을 매일매일 확인하며 마음을 졸이던 기억이 난다. 결국 천명이 넘는 사람들의 후원으로 펀딩은 성공했고 혜영, 혜정의 삶도 그렇게 새로운 장을 맞이했다.
혜영이 감독하는 다큐멘터리에 나는 음악감독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단순히 작품을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두 자매의 삶의 일부가 되었다. ‘작품보다 삶이 먼저다’는 혜영이 항상 고수했던 단 하나의 원칙이었다. 야간학교에 공부하러 가는 혜정을 따라가고, 광화문에서 열리던 장애인 차별 철폐 투쟁 현장에도 다녀왔다.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앞으로의 삶에 대해 고민하는 혜영을 옆에서 보았고, 18년 만에 시설 밖 세상으로 나와 하루하루를 좌충우돌 살아가는 혜정을 보았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 순간 내가 오래 전에 혜영에게 던졌던 질문이 나에게 다시 돌아왔다. “그냥 살고 싶은 곳에서 계속 살면 안돼요?” 처음 그 말을 던졌던 순간과 전혀 다른 온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