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
한국사
목록
오늘의 문해력 미션
먼저 글을 읽으면 읽기 완료로 바뀝니다.
📖 글 읽기 읽는 중
📚 문제 풀기 미제공
✍️ 글쓰기 대기
🪄 AI 첨삭 글 제출 후

한국사

장애인의 역사

우리는 조선 시대보다야 지금이 살기 좋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어쩌면 장애인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만큼은 조선 시대가 나을지도 모른다. 
신분의 벽이 두터운 조선 사회였지만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똑같은 이웃으로 받아들였고, 장애인의 사회적 자립을 장려했다. 
조선의 장애인 대접이 어땠는지 보여주는 기록 하나를 신문기사 형태로 재구성해 보았다.
image

1439년 12월 28일(1440년 2월 1일)
[부고] 좌의정 허조 별세

조선 개국 이후 역대 왕을 모셨던 재상, 경암敬菴 허조가 별세했다. 향년 71세.  
28일 재상의 가족들은 그의 사망을 확인했다. 말없이 혼자 웃고 있는 듯이 보여 이상하게 여긴 가족들이 살펴보니, 웃음을 띤 채로 숨을 거둔 상태였다고 한다.     
고인은 조선 초 중신이었던 권근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22세 때인 고려 공양왕 2년1390년, 과거에 급제해 관료생활을 시작했고 직후 조선 개국에 참여해 왕조 기틀을 세우고 법제와 각종 제례의 정비에 힘썼다. 법전 《신속육전》 편찬, 석전제례공자에 대한 제사 개정, 전국 학당 건립 등 유교 보급에 공헌했다.  
그는 평소 원리원칙을 중시하고 직언을 아끼지 않는 성격으로 유명했고, 덕분에 여러 번 좌천되기도 했지만 역대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의 엄격한 원리원칙은 평소 그의 청렴함 덕에 한층 진정성을 지녔다. 세종 대에는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그는 얼마 전 ‘태평한 시대에 나서 태평한 세상에 죽으니, 천지간에 굽어보아도 부끄러운 것이 없다. 내 나이 70이 지났고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으며 성상의 은총을 만나 간언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을 남겼다. 임금과도 거침없이 언쟁했던 그의 쓴소리는 충정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

기사에 언급된 허조1369~1439는 황희, 맹사성과 함께 세종 대의 명재상으로 꼽힌다. 예악을 정비하고 왕조의 기틀 마련에 헌신한 것은 물론, 청백리로도 유명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깨와 등이 굽는 척추장애가 있었지만, 성품이나 업무 능력이 올곧았고 역대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기사처럼 실제 《세종실록》에도 그의 장애에 대한 언급이 없고, 오로지 그의 생전 인품과 업적을 칭송하고 있다.

세종뿐 아니라 조선 역대 왕마다 최소 한두 명씩 장애인 관료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장애로 인해 관직에 오래 있지 못한 이들도 많았지만, 현재는 장애인이 고위 관료가 되는 일조차 드물다. 물론 실록은 그들의 장애가 아닌 업적을 기록했다.

조선시대에도 몸이 불편한 이들을 부르는 명칭은 있었다. 공식 문서상 명칭은 ‘잔질자’ ‘독질자’ ‘폐질자’다. 민간에서는 ‘병신’이라고도 했지만 지금처럼 경멸의 뜻은 아니었다. 그 때는 병이나 전쟁, 형벌 등으로 후천적 장애를 입는 사람이 많아서 그랬는지, 누구나 병에 걸릴 수 있듯 장애도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장애인은 가족들이 부양하는 게 원칙이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우면 마을 공동체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국가도 이들을 지원했다. 삼국시대부터 역대 왕조는 장애인 대상 진휼정책을 시행했고 조선 왕조 역시 장애인의 보호 및 복지 정책에 적극적이었다. ‘백성을 잘 보살피지 않으면, 그들의 원망이 하늘에 닿아 천재지변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유교적 통치 관념 때문이었고, 장애인의 처우는 민심을 대변하는 중요한 척도였다. 가장 적극적으로 장애인 복지 정책을 펼친 임금은 세종이다. 장애인에게 우선적으로 환곡식량을 빌려줌을 주고 거처를 잃지 않도록 하는, 장애인 진휼 정책을 즉위 직후 거의 매년 시행했다. 또한 명통시를 설립해 시각장애인들의 활동과 생계를 지원했다.

또 조선 왕조는 장애인을 ‘자립 가능한 사람’과 ‘자립 불가능한 사람’으로 나눠 지원 정도도 달리했다. 자립 불가능한 중증 장애인은 환과고독[1], 노약자와 함께 구휼에서 우선 순위였고, 국가는 각종 구휼 명목으로 이들을 직접 구제했다. 동서활인원이나 제생원 등 전문 구휼기관을 설치해 생활이 어려운 장애인들을 도왔다. 또 각 소재지에서는 이들의 진휼부터 사후 보고까지 담당했다. 나이가 많거나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의 경우 그를 돌봐줄 가족 구성원의 부역을 면제해 주었고, 필요에 따라 활동 보조인을 따로 붙여주었다. 때때로 노인과 함께 잔치를 베풀어 주기도 했다.

한편 자립 가능한 장애는 일자리를 얻어 자립하는 것을 권장했다. 시각장애인의 경우 많이 종사했던 일은 점복占卜, 즉 점 치는 일이었다. 대부분 백성들부터 왕까지 점에 관심이 많아 점복가들을 찾았고, 이 중 실력 있는 점복가들은 관상감[2]에서 명과학[3]을 담당하도록 했다. 이는 시각장애인만을 위한 관직이었다. 점복가 외에 음악 분야에도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종사했고, 이들을 위한 관직 ‘관현맹인’도 있었다. 관현맹인은 궁중 연주를 담당하는 악공으로, 엄연히 ‘정규직’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아 여인들만 참석하는 연회에 안성맞춤이었고, 주로 궁중 내빈들의 연회 내진연內進宴에서 연주했다.

조선시대에는 신체의 불편이 사회 진출의 장애가 되지 않았다. 북학파의 선구자, 홍대용은 저서 《담헌서》에서 ‘소경은 점치는 데로, 궁형당한 자는 문 지키는 데로 돌리며, 심지어 벙어리, 귀머거리, 앉은뱅이까지도 모두 일자리를 갖게 해야 한다’고 적었다. 조선시대의 장애인의 사회 진출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장애인들도 일을 해서 생계를 보장받았다.   

아마도 세계 최초의 장애인 단체, 명통시明通寺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조선시대 시각장애인의 대략적인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은 주로 해서海西, 황해도 지방에 살았으며, 점복을 배워 신수를 보는 일을 했다고 기록한다. 명통시에 대한 기록도 나온다. ‘명통明通’이란 밝음, 눈이 밝게 뜨이는 것을 의미한다. 한양 내 시각장애인들이 명통사란 절에 모이게 되었고, 태종 때부터 기우제에서 맹인들이 독경을 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기우제 주관 외에도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정기적으로 나라의 안위를 비는 독경을 했고, 엄격한 위계질서 아래 서로 독경을 배웠다. 국가가 이들의 생계 및 단체 활동을 지원했단 점에서 엄연히 공적 단체였다. 조정은 이들에게 정기적으로 쌀과 콩, 베 등을 하사했으며, 건물 앞엔 문지기가 있어 함부로 출입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근대적 소외

물론 개인 단위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회가 모든 장애에 대해 관대한 건 아니었다. 샴쌍둥이, 뇌전증(간질) 등 일부 질병이나 기형에 대해서는 인식이 좋지 않았으며, 장애인을 조롱하거나 학대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사회 전반적으로는 장애를 ‘조금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사람의 장애 대신 다른 능력을 보아 사회에 쓰게 했다. 조선 중기 유몽인의 설화집 《어우야담》 중, 다리 한 쪽이 짧은 지체장애인을 가리킬 때 ‘다리 하나가 길다’고 말해야 한다는 대목에선 조선 사회의 장애에 대한 관점을 엿볼 수 있다. 조선 시대의 많은 이들이 그들의 장애 대신 업적으로 기억될 수 있었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에게 저지르기 쉬운 실수 중 하나는 ‘장애를 노력으로 극복하자고 하는 것’이다. 은연중 장애를 부족한 것, 부끄러운 것으로 치부하는 시선이기 때문이다. 조선 사회는 장애는 그저 몸이 불편한 것일 뿐, 극복 대상으로 여기진 않았다. 

하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주자학의 영향으로 장애인이 사회에서 분리되기 시작했고,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해 생활이 어려워진 장애인들이 구걸하는 일도 많아졌다. 본격적으로 장애인의 소외가 시작된 건 개화기 이후였다.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장애 교육 및 복지가 도입되기도 했지만, 서구 의학과 산업의 발달은 대체로 장애를 ‘격리 대상’으로 만들었다. 과학의 발달은 사람이 병을 이길 수 있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과학적 성취로 인한 과도한 자신감은 동시에 사람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즉 우열을 나누게 만들었다. 근대 산업 역시 장애인을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했다. 노동 효율을 중시했던 데다 장애인들이 할 수 있게 설계된 일도 별로 없었다. 취직이 어려워진 것은 물론, 전통적인 장애인 직업도 하나둘 사라졌다.

일제 강점기는 장애인에게 더욱 가혹한 시기였다. 식민지에 국가 차원의 복지 정책은 전무했고, 장애인 부양의 책임도 온전히 가족의 몫이었다. 장애인들은 하나둘 사회는 물론 가정에서도 밀려났고, 덩달아 장애인에 대한 인식도 악화돼 지금에 이르렀다. 현재 우리나라의 장애인은 전체의 5%를 차지하지만, 이들이 사회생활은 물론 각종 일상생활을 하는 데도 수많은 난관이 존재한다. 장애인의 사회 진출에서 가장 큰 장애는 비장애인이 만든 것들이다.  
100년 정도 되는 소외의 역사가 결코 짧진 않지만, 공존의 역사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언제든 우리 곁에 열려 있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 

시각장애인들의 세종대왕, 송암 박두성
근대 장애인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훈맹정음’을 창안한 교육자, 송암 박두성이다. 그는 1913년 제생원 맹아부(서울맹학교의 전신) 교사로 부임하며 시각장애인 교육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제생원 맹아부는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일본어, 침구, 직업교육 등을 실시했다. 학생들이 수업을 이해하기 위해선 모국어, 한글을 배워야 했지만 당시 교육과정에는 일본어 점자만 있었다. 한글 점자가 있었지만 국제 규격에 맞지 않았고, 자음 간 구별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박두성은 1920년 비밀리에 한글 점자 연구에 착수했고, 1926년 글자 간 구분을 명확히 한 한글 점자 ‘훈맹정음’을 완성했다.  
1935년 제생원 맹아부를 퇴직한 뒤에도 그는 평생 점자 연구 및 출판, 보급운동을 계속했다. 그가 평생 고안한 점자 교재는 약 70여 종에 달하며, 사재를 털어 각 지방에 통신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의 한글 점자로 일제강점기 아래서도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었다. 광복 후 제헌국회에서는 그가 창안한 한글점자 투표가 승인되며 시각장애인들의 참정권 행사에 큰 역할을 했다. 한편 그는 청각·언어장애인 교육에도 힘썼으며, 때때로 그들을 위해 수화 통역을 맡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