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영국의 탐험가 오럴 스타인(Mark Aurel Stein)은 옛 호탄(Khotan) 왕국[1]의 단단-윌릭(Dandan-Uiliq) 사원 유적지를 탐험하다가 모래에 파묻혀 있던 목판화 한 점을 발견한다. 가로 46㎝, 세로 12㎝ 크기의 이 목판화는 아주 흥미로운 역사의 한 장면을 담고 있었다.
현재 대영박물관에 있는 이 작품은 <잠종서점전설도(蠶種西漸傳說圖)>. 이 목판화가 특별히 주목받은 이유는 바로 왼쪽에 그려진 두 인물 때문이다. 그림 한복판에 있는 여인은 화려한 화관을 쓰고 있고, 왼쪽 여인은 손가락으로 그 화관을 가리킨다. 이 장면이 뭐가 특별하다는 걸까?
힌트는 오른쪽 두 인물 아래에 있는, 비단을 짜는 ‘베틀’이다. 스타인은 그림 속 베틀이 인도 북부 지역에서 실제로 사용하던 베틀과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을 발견, 수수께끼를 풀 실마리를 잡았다. 또한 네 개의 팔을 가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인물은 누에와 비단을 관장하는 신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한다.
여러모로 이 그림은 누에나 비단과 관련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왼쪽의 여인은 누구고, 왜 화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걸까?

그림1_<잠종서점전설도>
불경을 구하러 인도로 떠났던 삼장법사 현장(玄奘:602-664)은 이 목판화가 묘사하는 역사적 사건을 기록으로 남겼다. 현장은 호탄 왕국에 들렀다가 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기록했다.
현장의 기록에 따르면, 화관을 쓴 여인은 호탄 왕국으로 시집온 후한(後漢) 왕실의 공주다. 당시 호탄 왕국에는 누에를 길러 실을 뽑는 기술이 없었다. 비단이 몹시 탐났던 호탄의 왕은 중국으로부터 누에를 얻으려고 몰래 사신을 보내기도 했지만 종자를 구하지 못했다. 비단은 큰 이윤을 남기는 주요 수출 상품이었기에 한나라는 비단 제조 기술은 물론 누에 종자가 서역으로 흘러가지 못하도록 엄격히 국경을 통제했다. 질 좋은 옥玉이 나던 호탄 왕국은 옥을 수출해서 부를 축적했지만, 비단을 수입하는 데 그 돈의 대부분을 써야 했다.
누에를 구하고 싶었던 호탄 왕은 꾀를 냈다. 한나라 왕실의 여인을 왕비로 맞아들이기로 한 것. 혼인을 통해 외교 관계를 맺는 건 당시에는 매우 흔한 일이었다. 후한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자, 호탄의 왕은 시집올 공주에게 은밀히 전갈을 보냈다. 중국 왕실에야 비단이 흔하지만 호탄에는 비단이 없으니, 비단옷을 입고 싶으면 누에 종자를 꼭 가지고 와야 한다고.
공주는 이 말을 곧이듣고 호탄으로 떠날 때 누에 종자를 머리에 쓴 화관 안에 꼭꼭 숨겼다. 누에와 비단 반출에 대한 감시가 매우 심해서 공주 역시 국경에서 검사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한나라 군인들은 차마 공주의 관을 벗기면서까지 검사하지는 못했다. 그 덕분에 공주는 누에 종자를 무사히 호탄으로 들여왔다. 호탄으로 건너 온 중국의 누에와 비단 제조 기술은 결국 서역으로까지 전해진다. 오럴 스타인이 발견한 목판화는 이 얘기를 오롯이 담고 있었다.
문명 교류의 흔적은 또 다른 그림에서도 발견된다. <여래도(如來圖)>(그림 2)는 21세기 <잠종서점전설도>가 발견된 단단-윌릭 유적지에서 발견됐고, <비사문천왕상(毘沙門天王像)>(그림3)은 2000년대 초반, 호탄 왕국의 도모코(Domoko) 유적지에서 출토된 작품이다.
두 그림 모두 <잠종서점전설도>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두께의 붓놀림으로 인물을 묘사했다. 마치 균일한 두께의 철사를 구부린 것 같다고 해서 이 선을 굴철선(屈鐵線)이라고 부른다. 호탄 왕국의 불교 미술에 사용된 이 독특한 화법은 이후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전해졌고, 우리나라와 일본의 불교 미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굴철선 묘사법으로 그려진 아시아 전통화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이런 느낌의 그림을 익숙하게 느끼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 화법을 동아시아 전체로 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위지을승(尉遲乙僧)’이다. 위지을승은 염입본(閻立本), 오도현(吳道玄)과 함께 당나라의 미술을 대표하는 3대 화가로, 염입본과 오도현이 중국 본토에서 성장한 중원파(中原派)라면 위지을승은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 밖에서 유입된 서역파(西域派)를 대표한다. 호탄 왕국의 왕실 출신인 그는 당나라로 파견되어 호탄의 불교 미술과 문화를 전파했고, 그 덕분에 당나라의 관직을 하사받기도 했다. 아버지 위지발질나(尉遲跋質那) 역시 당나라 이전인 수나라 말기에 낙양(洛陽)에서 활동한 유명한 화가여서, 아버지를 대위지(大尉遲), 위지을승을 소위지(小尉遲)로 구분해 부른다. 이들 부자 화가로 대표되는 호탄 왕국의 화풍을 ‘위지파(尉遲派)’로 분류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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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2_<여래도> | 그림3_<비사문천왕상> |
당나라의 문화인들은 이들 그림을 매우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우선 소재 자체가 무척 새로웠다. 이들 부자는 중원 사람들에게 낯선 서역의 문물과 전설을 그림으로 그려냈다. 때문에 당나라 말기의 《당조명화록》이라는 책에서는 위지을승을 다음과 같이 평한다. “인물과 화조(花鳥)는 모두 외국의 것들이지, 중국의 것이 아니”라고, 중원의 화가들과 소재가 뚜렷이 구분되는 “신품(神品)”에 해당한다고.
당나라 미술계가 충격받은 이유는 또 있었는데, 바로 이들의 독특한 화풍 때문이었다. 위지 부자는 인도와 간다라 미술[2]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호탄의 화풍을 그대로 전파했는데, 이는 당시 중원의 화가들의 작품과 뚜렷이 구분된다. 위지을승의 작품 두 점을 잠시 소개한다. 그림4를 보면, 한눈에 봐도 선을 이용한 묘사가 완숙의 경지에 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5는 유럽의 인상파 화풍을 연상시킬 만큼 선과 색채의 배합이 과감하고 독특하다. 또한 그림에 표현된 위지파의 ‘요철(凹凸) 화법[3]’은 당시 중원의 회화 수준보다 한걸음 앞선 것이었다.
이처럼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을 지나는 실크로드에 자리 잡았던 호탄 왕국은 인도와 페르시아, 그리고 중원의 문화와 문명을 연결하는 매개자였다. 앞서 호탄을 통해 중국의 누에와 비단이 서쪽으로 전해졌다고 했지만, 이들을 통해 전해진 게 설마 그 둘뿐이겠는가? 이들은 끊임없이 서역의 문화와 문물을 중원에 소개하고, 반대로 중원의 문화와 문물을 서역으로 전하는 매개자임과 동시에 실크로드 문화의 집결지인 당나라 장안의 문화를 이끌어가는 문화적 주역이기도 했다.
비록 중원의 민족과 인종적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코카서스[4] 계열의 색목인(色目人)들이었지만, 이들이 의식적으로 전파한 새로운 화법과 소재, 상상력은 당나라의 불교 미술은 물론이거니와 문화 전반을 넓히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위지파의 화풍을 빼고 당나라 미술을 이야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호탄 왕국으로 대표되는 실크로드 남쪽 길의 모든 민족의 문화적 기여를 고려하지 않고 중국 당나라의 문화를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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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4_<여래도> | 그림5_<비사문천왕상> |
Footnotes